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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 갑 재 (본지명예회장, 지방의원 5선)

기사승인 2021.11.19  16: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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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수자 여사님의 49재에 즈음하여...

   
 

얼마 전에 윤상기 군수의 사모님인 하수자 여사께서 작고하셨다. 고인의 훌륭한 인품에, 우아하고, 아름답고, 지역에 헌신적이었고, 가정을 잘 꾸렸고, 남편인 윤상기 군수를 잘 내조했다는 것이 군민의 일반적인 평판이다. 이것만으로도 고인을 추모하고 회고하는 일은 당연하다.

원래 아내가 남편보다 어리다면 남편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하수자 여사는 긴 병을 앓다가 남편인 윤상기 군수보다 먼저 작고했다. 정치인의 아내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이 간다. “22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다.....손수 운전기사 노릇도 마다하지 않고 험한 일을 도맡아 해결해주었다...남편을 하동군수로 만들어주었다.”는 윤상기 군수의 고인에 대한 회고담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필자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여사의 부고에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서 어떤 의미인가라는 본질적인 생각도 했다. 삶도 다 모르면서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분명 주제넘은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공부라 여겨주시길 바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죽음은 거룩하다. 선자건 악자건 그 어느 누구의 죽음도 모두 거룩하다. 원래 선악이야 삶의 과정의 문제일 뿐이다. 이 선악의 문제를 죽음의 세계에까지 이어가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느 누구는 학창시절 그 하기 싫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박사가 되어 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고 이 때문으로 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으며 죽었다고 하자. 반면 어느 누구는 주색잡기를 즐기다 여기저기를 떠도는 노숙자가 되어 한 겨울에 어느 구석진 거리에서 동사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노숙자의 죽음이 덜 거룩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 세상에 이로움을 끼친 것 때문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감당했다는 것이 거룩함의 중요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그 추위를 온 몸으로 감당하는 일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노숙자는 그 고통으로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박사의 고통을 뒤늦게 다 받은 것이다.

혹자는 박사는 세상을 이롭게 했지만 노숙자는 조금도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않았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박사가 세상을 이롭게 한 것은 산 자의 입장일 뿐이고 또 박사가 그렇게 사회에 공헌을 했어도 삶이 고통인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박사나 노숙자나 그들이 감내한 삶의 고통의 크기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박사나 노숙자의 삶은 동등하다.

필자가 모든 죽음은 거룩하다고 해서 죽음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일방이 완전히 들어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삶과 죽음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 세상이다. 한 생명체의 죽음의 이면에는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대단히 강렬한 생존본능이 있다. 이 생존본능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기는 어렵지만 간혹 죽음을 각오하고 덤빌 경우,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일은 거의 없다. 이것이 죽음은 거룩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유력한 증거가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필자의 고인에 대한 추모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생존본능을 넘어서는 큰 고통이다. 필자는 이 큰 아픔 앞에 겸허를 배우며 한 정치인의 아내로서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내하신 하수자 여사의 평안한 영면을 진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하동군민신문 hdgm97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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